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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공부와 투자/세계경제

아테네 은광 살라미스 해전: 유럽의 부와 경제를 이해하다

by 靜)태평어람 2025.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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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은광과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역사를 일부 살펴보게 되면 유럽의 부와 경제를 이해할 수 있기도 합니다. 과연 어떤 내용들이 담겨져 있을까요?

 

오늘은 아테네 은광 살라미스 해전: 유럽의 부와 경제를 이해하다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테네 은광

기원전 493년 집정관으로 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위협하던 페르시아를 상대하려면 해군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막대한 재원을 감당할 방법이 없었죠.

이런 와중에 서기전 483년에 라우레이온 은광이 발견되게 됩니다. 은광의 발견으로 적자에 시달렸던 아테네의 재정은 단숨에 흑자로 반전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결국 은광 덕분에 선박을 정박하는 항만을 건설, 에게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갤리선'이라 불린 3단 노선을 300여척 건조해야 한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게 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은광에서 일해 번 돈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불어 내수시장도 다시 살아나고, 소비가 증가하자 생산과 수입도 그에 비례해 늘어나, 결국 주변 나라의 많은 재화가 아테네로 몰리게 됩니다.

 

은의 순환 고리는 이렇게 아테네 경제의 선순환을 만들어 냈고, 생산과 도매, 소매 과정을 계속 거치면서 부가가치의 창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돈이 돌면서 시장은 활기를 띄었고 재화와 돈이 도는 회전 속도가 빨라져서 아테네 경제의 발전 속도도 빨라지게 됩니다.

 

은광 개발로 인한 일자리 창출을 시작으로 내수시장이 활성화되자 아테네는 주변 폴리스들의 부러움을 산 것은 물론 경쟁 관계에 있던 스파르타나 테베에 비해 경제적 우위를 점유하게 됩니다.

이제 아테네의 경쟁 상대는 에게해 건너편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페르시아 밖에 없었습니다.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 200여척의 갤리선이 완성되자 아테네는 이를 앞세운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게 되는 되요.

해상무역 덕분에 해운 산업은 꽤 발달했지만 해군력이 볼품없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시장에 은이 많이 풀리자 은의 희소성이 떨어지면서 물건의 금액이 크게 오르게 됩니다. 과도하게 풀어버린 통화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물건의 가치가 커지면서 금액이 오른 것이죠. 이는 아테네와 같이 '드라크마'를 사용하던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됩니다.

 

상대적으로 희소성이 커진 품목이 하나 더 생기는데, 바로 금이었습니다. 은에 비해 금의 보유량이 현저히 적었던 희소성 때문에 금의 금액은 계속 올라가게 되는 것이죠.

셈이 빨랐던 페르시아 상인들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당시 페르시아가 은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물건을 거래할 때는 금을 주로 썼습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보다 사용하는 은의 양이 적었기 때문에 금이 은보다 비싸기는 했지만 그리스처럼 금과 은의 금액 차이가 크지는 않았죠.

페르시아보다 그리스에서 금과 은의 환율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더 커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은을 기준으로 봤을 때 금은 페르시아보다 그리스에서 더 비싸게 거래되고 있었으니까요. 이에 페르시아 상인들은 금을 그리스로 가져가면 더 많은 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환차익을 노린것이죠.

그 결과 페르시아의 금이 대량으로 그리스에 유출되면서 금본위제 국가인 페르시아에 금이 부족해졌고, 통화 시장이 왜곡되면서 상품이 거래되면 내수시장은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페르사아로서는 더 이상 손 놓고 있을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서기전 480년, 페르시아는 군대를 태운 함대를 그리스에 보내기로 합니다. 금의 급격한 유출은 페르시아 경제에 혼란을 가져왔고, 살림살이가 힘들어진 페르시아인들의 불만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페르시아는 전쟁이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살라미스 해전의 시작(1868년)

살라미나섬 동쪽에 주둔하고 있던 그리스 연합군과 이들을 봉쇄한 페르시아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를 말합니다.

 

세계 최초의 동서양의 대결이라 불리는 페르시아 전쟁은 살라미스 해전으로 승패가 갈리게 됩니다. 

이 해전에서 그리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결국 지중해 일대에 식민지를 건설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게 되는 것이죠. 향유된 문화는 그리스를 동경한 로마가 성장하는 데 기초가 되고 중세로 이어져 독자적인 유럽 문화의 뿌리가 됩니다.

즉 오늘날 서구 문명의 원류를 그리스 문명인 것입니다.

은광으로 구축된 해군력이 없었더라면 그리스는 패했을 것이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은광을 통한 안정적인 은 확보가 가능했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로부터 대량으로 유입된 금이 있었기에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물자 조달을 비롯한 전쟁 지속 능력이 훨씬 앞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차이는 결국 전쟁의 승패를 넘어 국가와 세력의 흥망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고 이런 역사적 사례를 거울삼아 항상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한것 같습니다.

마치며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그 사건들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 더욱 더 유럽의 경제와 부를 이해하기 쉬워지기도 하니까요.

 

우연히 발견된 아테네의 은광을 통해 이후에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과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그리스가 승리하게 되었고, 서구 문명의 역사는 그리스를 중심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아테네 은광 살라미스 해전: 유럽의 부와 경제를 이해하다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이상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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